6월 7일 제15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

작성자
사업회
작성일
2019-07-25 12:12
조회
1270


6월 7일 오전 11시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 7층 강당에서 제15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최연소 비전향장기수이자 보안관찰법 폐지를 위해 싸워오신 강용주 선생님이 올해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비가 오는 다소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강당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강용주 선생님의 박종철인권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길에 박종철기념사업회도 함께하겠습니다.

[1] 제15회 박종철인권상 심사평

수상자 : 강용주 아나파의원 원장

올해 제15회 박종철 인권상에는 4단체와 1명의 개인이 수상 후보로 추천되었습니다. 이중 심사위원회의 심의 결과 강용주 씨를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1. 국가의 제도적 폭력에 맞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진전시켜온 공로를 인정했습니다.
‘세계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알려진 강용주 씨는 광주 동신고 3학년 시절 광주 5.18을 겼었습니다. 총을 들고 계엄군에 맞섰지만, 도청이 함락되던 1980년 5월 27일 새벽 그는 두려움에 총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때의 부채의식으로 전남대학교 의대에 진학한 뒤에 학생운동에 전념하다가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안기부에서의 고문에 의해 굴복했던 그는 “폭력에 굴복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개가 된 자신, 쓰레기통에 처박혀서 울고 있는 상처 입은 내 영혼을 보면서…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서 망월동에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었다.”는 의지를 다집니다.
독재권력의 모진 전향공작을 이겨내고 비전향 장기수로 수감생활을 해온 그는 1998년 변형된 전향서인 준법서약서마저 거부했습니다. 1999년 2월 마지막 장기수로 출소하기까지 그는 14년의 시간을 “칼날 위에 서서 내가 칼날이 돼서” 살아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다시 그에게 보안관찰법을 적용하여 그를 굴복시키고 통제하려 했습니다. 보안관찰법에 따른 부당한 신고의무에 불복종하였고, 이로 인해 2002년, 2010년, 2016년 세 차례에 거쳐서 기소되었습니다. 앞의 두 번의 재판에서는 벌금형이 선고되었지만 세 번째 재판에서 법원은 그에게 무죄판결을 했고, 이후 무죄가 확정되었고, 법무부는 이후 2018년 보안관찰 처분을 면제하여 비로소 출소한 지 19년 만에 보안관찰의 족쇄에서 벗어났습니다.
국가보안법, 사상전향제도, 준법서약서, 보안관찰제도에 맞서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한 긴 여정은 우리 사회의 인권지평을 넓혀온 고단한 행진이었습니다.

2.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의 곁을 지키며 슬픔의 연대를 확장시킨 공로를 인정했습니다.
출소한 뒤 전남대 의대에 복학하였고, 2008년에 가정의학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였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과 같은 고문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재단법인 진실의 힘 창립에 이사로 참여하였고,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5.18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치유를 돕는 광주 트라우마 센터장을 맡아 트라우마에 대한 전문 치유의 길을 열었습니다.
고문과 전향공작 등의 국가폭력의 생존자인 그는 자신이 당한 고통 안에 갇히기보다는 같은 처지의 고문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의 재생을 돕는 역할에 적극 나섰습니다. 5.18 피해자, 고문피해자, 조작간첩 피해자, 세월호 생존자에게까지 그의 ‘슬픔의 연대’는 확대해갔습니다.

3. 심사위원회는 강용주 씨의 일생을 건 투쟁으로 우리사회가 인권세상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심사위원회는 우리사회를 대신하여 강용주 씨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드립니다.

2019년 6월
제15회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박동호

[2] 제15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소감

부족한 저를 제14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없이 영광스럽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한없이 부담스럽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역대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7회 김진숙 노동자, 9회 밀양 송전탑 반대위, 12회 백남기 농민, 13회 416가족협의회, 14회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정비단 등 모두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압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또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지키고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신 너무도 훌륭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변변치 못한 제가 그런 분들과 함께 수상자 대열에 설 자격이 있는지 자문해보면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새삼 박종철 열사에 대한 옛날기억이 되살아나 오래된 서류를 뒤적여 보았습니다. ‘좌익 재소자 사상동향 카드’입니다.

1987년 2월 7일 – ‘2 .7 추도회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조식부터 석식까지 단식함.’
1987년 2월 9일 – ‘전방조치 2. 7 단식에 따른 조치로서 6중에서 16하로 전방조치함’

32년 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1987년, 저는 지은 지 얼마 안 된 ‘동양 최고의 중구금시설’인 대전교도소 6사 중층에 있었습니다. 조작간첩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되고 전향공작이 시작되었던 때입니다. 24살 청년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외로웠던 비전향 장기수의 길로 힘겹게 한발을 내딛던 순간이었습니다. 같은 사건 관계자들이 한사람씩 전향서를 쓰고 이감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전향공작 중이라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를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1987년 2월 7일, 전국적으로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가 벌어졌습니다.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는 스물한 살 박종철의 나이와 같은 스물한 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밖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 구치소에서, 광주교도소에서, 그리고 제가 있던 대전교도소에서도 추모단식을 했습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고문의 트라우마는 시시때때로 고문생존자들을 고문을 받던 그 시간, 그 장소로 데리고 갑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종철이가 남산 안기부 지하실의 용주가 됩니다. 고문실의 그 고통, 그 처절함, 그 굴욕… 고문으로 죽은 종철이를 위해 고문 받고 살아남은 용주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식밖에 없었습니다. 고문 없는 세상을 위해, 종철이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그리고 이틀 후 단식을 했다고 저 혼자만 16사하 징벌방으로 끌려갔습니다. 구호를 외치며 그 투쟁을 조직한 다른 민주인사들은 놔둔 채 비전향수가 단지 동조 추모단식을 했다는 이유로요. 그렇게 저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80년 5월에 결정돼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제 ‘영혼이 쨍하고 금이 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청 앞 수협을 지키고 있던 저는 총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군사독재와 싸웠습니다. 그러다 소위 ‘구미유학생 간첩단’으로 조작되어 남산 안기부 지하실로 끌려갔습니다. 미국은커녕 경북 구미도 가본 적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고문에 굴복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개가 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형(刑)을 살면서 저는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 버린 제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라도, 기어서라도, 영혼만이라도 떳떳하게 망월동으로 다시 가고 싶었습니다. 저는 ‘전 존재를 걸고 전향제도와 싸우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80년 5월 총을 버리고 도망쳤던 18살 소년이었고, 남산 안기부에서 고문에 굴복해 개가 된 23살 청년이었던 저는 오직 제 마음의 소리, 양심의 소리에 충실히 따르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14년 동안 감옥에서 싸우게 됐습니다. 결국 전향제도는 폐지되었고 준법서약서도 무력화됐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19년을 싸워 보안관찰 재판에서 무죄를 받아냈고 작년이 돼서야 비로소 보안관찰에서도 면제를 얻어냈습니다. 저는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걸어왔습니다. 잠시 길에서 멈추기도 하고 못 걷겠다고 퍼질러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 곁에서 묵묵히 손 잡아주고 함께 걸어주고 따듯한 눈길로 바라봐주던 분들이 저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 연대하는 마음들 덕분에 ‘양심의 자유’를 포기하지않고 비틀거리면서도 걷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종철 열사가 죽음에 이르는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가치, 꿈꾸었던 세상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민중과 함께 언제나 살아 있으며 지금도 우리사회 민주주의 진전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박종철 정신’을 떠올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열사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살게 된 지 벌써 32년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분명히 증진됐지만 여전히 부족할 뿐더러 이제는 퇴행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한 예가 조작간첩 사건의 배상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과거사 국가 배상 사건에서 소멸시효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한정 위헌 결정을 내렸고, 올 4월, 진도간첩단 사건 피해자 박동운 선생님은 고등법원에서 국가배상 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달 초 과거사를 바로잡겠다는 현 정부 법무부가 이명박근혜 사법농단 세력과 똑같이 사건을 대법원으로 끌고 갔습니다. 28년을 싸워 억울한 간첩 누명을 벗었는데, 또다시 최소한의 배상 문제로 10년 가까이 다시 국가와 싸워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촛불정부’에서 연출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며 죽어가면서도 박종철 열사가 꿈꾸었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청년들의 꿈이 정규직이 되고 공무원이 되는 사회’는 아니었을 겁니다. 10년간 두 번의 민주정부가 있었고 지금은 촛불정권이 들어서 있는데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한 것일까요? 혹시 87년 체제는 ‘장기 386 체제’로 새로운 기득권으로 변화했고, 정치적 슬로건을 달리 하는 그들끼리의 리그로 이미 오염돼 버린 건 아닐까요? 우리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뼈아픈 반성과 새롭고 담대한 구상을 해야 할 시기인 듯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폭력과 고문의 시대가 아닌 자본과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현재 ‘박종철들’의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박종철이고,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겪고 있는 세칭 ‘흙수저’ 취업준비생들이 박종철이고,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였던 김용균씨가 바로 이 시대의 박종철의 모습입니다. 박종철 열사가 마련해 준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게 살아남은 우리들의 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를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신 것은 자유와 평등를 향한 우리 모두의 투쟁의 길에서 앞으로도 함께 손잡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저 개인과 광주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들과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우리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만들어가고, 후대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지, 거기에 제가 어떻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더 깊이 성찰하겠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를 날줄로 평등을 씨줄로 삼아 연대의 희망을 그려 나가려 노력하겠습니다. 32년 전 한 청년이 바로 이 자리에서 죽음 속에서도 꿈꾸었던 세상을 위해 앞으로도 권력과 기득권에게 좀 더 불편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저를 추천 해주신 분과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분들께,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