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8일 한겨레 기고문 ‘올해도 유가족들만 섧게 우는가’
올해도 5월을 지나 6월로 접어들었다. 5월이나 6월이나 이 나라 역사에는 매우 중요한 달임은 새삼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와 같은 유가족들은 5월과 6월이면 전국을 돌면서 추모제 치르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분신으로 죽은 이들, 경찰에 맞아 죽은 이들, 죽고도 아직 사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이들의 무덤 앞에 서면 매번 할 말을 잊는다. 비석의 앞뒷면을 훑어보면 대체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결혼을 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학생,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운동가 등 신분도 다양한 그들이 대체로 10년 전부터 많이 죽었다. 한때는 분신정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죽어간 때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도 생존권으로부터 조국의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염원하며 죽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10년 전의 시간에서는 민주주의가 그만큼 소중했고 조국통일이 그만큼 절실했다. 스물 남짓의 생목숨을 던질 정도로…. 어떤 이는 죽어서 시체마저 빼앗겼던 사람도 있었다. 어떤 가족들은 자식의 시체마저 빼앗겨 불에 타죽은 자식을 또 불에 태워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어떤 유가족들은 동굴에서, 바다 한가운데서, 어느 으슥한 산모퉁이에서 죽었다는 자식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어야 했다. 죽은 자식은 있는데 죽인 자는 없는 세상,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죽은 자식은 있는데 그 자식을 죽게 만든 이들은 아직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있는 세상이다.
세월이 흐르면 세상은 변하는 것, 세상의 변화에 맞춰 우리 유가족들도 죽은 자식 이름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식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세상이 좋아졌으니 하고 위안을 삼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 자식들이 죽어갈 때 무슨 부귀영화를 바랐던 것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었기에 역사 속에서 언젠가는 작은 귀퉁이 한 자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날이 오겠거니 하고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죽어간 우리 자식들이 목숨까지 던져가며 염원했던 그 세상은 멀었기에 우리도 자식들의 뜻을 기억하고 대답없는 메아리가 될지언정 세상에 자꾸 외쳐야 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생각해본다.
그래도 광주항쟁 희생자들에게는 정부 차원에서 무슨무슨 대책을 세워주고 하지만, 멀리는 70년 전태일로부터 가깝게는 올해의 최정환에 이르기까지 기억해줄 이가 없는 죽음들은 너무도 서글프다. 이 나라의 정의와 올바른 역사를 위해서도 엄연히 역사로 존재하는 이들의 죽음을 이제는 구천을 떠돌게 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부당한 노동자 탄압에 맞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외쳤던 현대자동차의 양봉수 동지가 지금도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죽어간 많은 이들은 함께했던 동지들이,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앞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서글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는 10일에는 여섯 번째 맞는 ‘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가 전국에서 치러진다. 재야들이 모여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을 오늘에 이어받아 투쟁을 결의한다. 올해도 2백명이 훨씬 넘는 이들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불릴 것이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죽은 자식의 영정에 조화를 바칠 것이다. 또 그 제단 앞에서 유가족들은 서러워 울 것이다. 뭐 하려고 죽었느냐면서.
난 내 자식의 죽음으로 살고 있다. 내 자식의 죽음이 어느 누구의 죽음보다도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유가족들은 그렇게 믿고 산다. 이거이 우리만의 독단적인 생각일까. 이제는 유가족과 재야만이 추모하는 그런 합동추모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박정기
전국민주주의민족통일유가족협의회 회장
1995년 6월 10일 범민주민족열사 합동추모제 인사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이 있기까지 산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힘을 주시었던 수많은 선열에게 경건한 자리를 빌려 옷깃을 여미면서 초례를 드립니다. 올해로 범민주민족열사 합동추모제가 6차년을 맞습니다. 이 제단에 마땅히 모셔야 할 선열은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운데 그분들의 영정과 신위를 다 모시지 못하는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강산도 변하고 민심도 변했다고들 합니다. 해방 50년과 군부독재 35년의 굴레에서 민족적 과업을 외면하고 소수집단이 외세와 결탁하여 우리 민족의 힘으로 맞이할 해방과 통일의지를 짓밟는 행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 안에 혼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민족의 경제와 정치를 외세에 떠넘겼습니다. 외세의 착지와 굴종은 고스란히 힘없는 민중들이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으로 꽃피우면서부터 이 땅에는 숭고한 조국 사랑의 움, 싹이 활발히 태동해서 전두환의 재집권 야욕을 저지하는 국민의 뜻이 6.10항쟁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1987년 6월항쟁은 그간 젊은이들이 투쟁으로 지핀 불꽃이 조국의 제단에 바친 넋들의 함성이 군사독재를 물리치는데 총집결되어 전두환, 노태우의 6.29항복선언을 받은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날을 기리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태어난 값어치를 못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듯 합동추모제를 치르는 것은 그저 망연자실하니 앉아 죽은 자식과 혈육의 죽음 앞에 통곡이나 하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내 자식, 나의 혈육이 흘리고 간 피가 그 어느 명예나 부귀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아직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식이 죽기 전에 외쳤던 조국의 민주화가 통일이 아직도 너무나 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애도와 묵념의 자리가 아닌 투쟁과 전진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현 정부는 세계화, 국제화의 기치를 들고 전 국민이 여기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계화, 국제화로 나아가는 것도 국제정서에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현 정권의 시발이 3당합당으로 민의를 벗어났지만 출범 당시 개혁의 기치를 꽂았을 때만 하더라도 좋은 어린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옹졸한 기반으로 인해 개혁이라는 도덕적 기치를 어느새 내팽개치고 말았습니다. 속된 말로써는 속일 수 없다더니 군사정권과 같은 굴레에서 나온 김영삼 정부의 요즘 행위를 보면 이제는 구제 불능인 것 같습니다.
이 땅의 노동을 민족 양심이라고 하면서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을 거부하는 정치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노동자 되기를 거부하는 나라가 있을 수 없고 노동자를 푸대접하는 정치나 정권은 규탄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계화 추세에는 문화나 경제의 발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서 간 냉전체제가 허물어진 지 십 년이 넘어 강산도 변해가는데 현 정권이 지금도 구태의연하게 낡은 이데올로기를 대입시기는 것은 역사에 누를 남기게 될 것이요. 진정한 세계화에 역행된다고 봅니다.
김영삼 정권은 구시대 이념대립의 상징물인 평화와 화해, 공존이라는 세계화의 추세를 가로막는 국보법을 폐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단결된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고 통일로 세계로 나아가는 참 세계화의 수순을 밟아가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장기수, 양심수 전면석방을 단행하고 도덕정치의 실현으로 개혁도 필요가 없는 날. 평화로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신비한 묘안은 7천만이 원하는데, 이것이 지연되고 이루지 못함은 어떤 구실과 그럴듯한 명분을 갖다 붙여도 정치집단들의 과오는 씻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마지막으로 1987년 6월항쟁 이후 국민의 힘을 모아 이룩한 4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우리 앞에 드디어 다가왔습니다. 풀뿌리 선거라 합니다. 뿌리 따로 줄기 따로는 기현상입니다. 온 민족이 갈망하는 민주주의 뿌리를 심는 데 다 같이 참여해서 좋은 조국과 조상을 사랑하는 미덕으로 지구촌의 모범이 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여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주는 데에 한 몫 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는 모든 정치, 종교, 사상, 개인의 차이를 넘어 치르는 행사인 만큼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4천만 국민의 늘 살아있는 열사의 뜻을 오늘에 되살리도록 함께 노력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제6회 본 행사를 주도해주시는 전국연합과 민노총 측에 감사의 영예를 드리고 측면에서 후원해주시는 모든 단체, 웃어르신 그리고 동참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뜨거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995년 6월 10일 전국 민주주의 민족통일유가족 협의회 회장 박정기
1995년 1월 6일
95년 1월 4일 오후 한울삶에 혼자 있다. 한울삶지기가 된 것일까. 7시 뉴스에선가 한국도 ‘국제 UN 인권 고문방지 협약’에 가입한다는 소식이 나온다. 머리가 띵하다. 저게 무슨 소린지. 생각은 금방 흩어진다. 그래도 이미 짐작은 있었나 보다. 그럼 그렇지. 사람 사는 세상 만들자고 사람이 얼마나 죽어갔나. 네놈들의 손에, 그 힘의 정치에, 몸서리치는 고문으로 정신과 몸이 망가진 이들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갔어야만 했던가. 그것도 모자라 병마와 투병으로 온몸을 다 바쳐가며 남긴 수많은 사연이 여기에 있다. 네놈들 어디 보자고, 순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다.
1996년 8월 9일
8일 한울삶 간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8일에서 10일까지 장기수 석방 캠페인을 하는데, 내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8일에 나온 공지를 보지 못했다. 대신 9일 오전 10시에 가겠다고 했다.
9일 10시 정각에 명동성당 입구에 갔더니 이 한더위에 장황하게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0.75평짜리 감방 7개를 만들었다. 무더위로 모두가 고역이었다. 중간중간에는 거리 캠페인을 펼쳤다. 0.75평 모의독방에는 이향우 변호사를 비롯해 6명이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무려 10시간을 일일 양심수로 지냈다. 한참 더위에는 고된 일이다.
사실 국보법이란 해방과 동시에 없어졌어야만 했던 법이다. 이것을 버리지 못한 데에는 이승만을 앞세운 미 제국주의가 진작 처단되었어야 할 일제 때 민족반역자를 통치 편의의 도구로 삼았던 탓이 크다. 이후 국보법은 반공법과 노동악법으로 개악을 금치 못했고, 안기부의 공안정치는 통일을 언제나 가로막고 있다. 7.4공동성명이나 평화협정이나 이행이 안되고 있기는 매한가지에다 경수로 문제까지 있는 실정이다. 여기다 근래에 북한은 심각한 수해를 입어 민족적 차원에서 여러 경로로 돕기에 나서고 있으나, 국보법에 의하면 이러한 민간 차원의 도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나의 민족이 미국, 중국, 일본에 의해 통일되지 못하고 반 세기를 넘기면서 산다면 이를 우리 후손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먼저 통일 이전에 양심수라는 존재는 없어져야 한다. 양심수를 만드는 악법이 활개치는 기이한 나라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욱이 김영삼 정부 들어 양심수의 숫자가 더 늘어난다고 하니 우리는 인권이 결여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의 인권 캠페인이 국제적으로도 선전되는 데에 반해 국가행정은 기만적이니 민간 인권단체에서는 인권센터 등을 만들어 더욱 활발히 활동할 것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선진국을 따라가려면 무엇보다 첫째가 인권존중이요, 도덕정치일 것이다. 요즈음은 특히 더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기업주의 횡포를 국가에서 미적지근하게 처리하는 행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캠페인으로 하루만 함께하기에는 부족하니 앞으로는 더욱 인권센터에서 주어진 일에 헌신할 것이다.
2000년 4월 1일 제주4.3추모제 및 4.3공청회
제주 4.3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이 법은 지난 99년 15대국회 회기말 12월 **일 ‘명예회복 의문사진상규명 법’과 함께 입법되었다. 제주 4.3이란 민족사에 있어 가장 잔인무도한 사건 중의 사건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비극은 없었다. 마음이 새카맣게 될 아픔을 입고서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온 제주시민들. 대충 말만 들어도 그 마음이 짐작된다.
1948년 당시 제주도를 난자한 이승만의 정치독식과 미국의 사주에 맞선 제주도민의 봉기는 용감했다. 5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뤄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과연 국민의 관심 속에서 올바로 풀어질 것인지에 대해 발제자나 토론자 모두 한결같이 우려를 표하며 토론에 임하는 모습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우리의 수준을 탓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범국민적인 관심을 가지고 얽힌 타래를 풀지 않으면 힘들다고들 말한다.
4월 3일에는 제주에서 52주년 추모행사가 있다. 5년 전부터 4.3 범국민위원회에 공동대표로 참여해오고 있는 탓에 벌써 행사에 관여한지 오래다. 이번 4월 3일 역시 초청 형식으로 간다.
4월 1일은 막내 생일이다. 2일이 일요일이고 해서 동문들과 의논하고 우리 가족은 이날 하루를 마석 막내 무덤에서 보내기로 했다. 13년 전 일이다. 올해 서른 세살인지 잘 모르겠다. 정신이 아찔해 진다.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있었을까. 그 누구에게도 없어야 할 일. 아직도 막막하다. 눈앞이 보이는 것마다 꺼치럽다. 어디까지가 그것이고,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야하는 일, 쉼 없이 같이 가자. 마치는 날까지 가자. 오늘도 내일도.